[이건희의 파란만장 78년] 삼성가 막내아들에서 후계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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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의 파란만장 78년] 삼성가 막내아들에서 후계자로
  • 이미란 기자
  • 승인 2020.10.25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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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인포맥스) 이미란 기자 = 한국에서 가장 극적인 성공신화를 쓴 경영자, 밀레니엄 시대에 삼성을 글로벌 IT(정보기술) 최강자로 키워낸 통찰력을 가진 현인, 무노조 경영을 철칙으로 삼았던 자본가, 은둔의 황제.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대표하는 수식어는 다양하다.

부친 이병철 선대 회장의 타계로 1987년 삼성 경영권을 물려받은 후 신경영 선언을 통해 최단 시간에 반도체 등 20종의 글로벌 1위 제품을 만들어내는 수완을 보여줬지만 정경유착의 암울한 이면 등을 통해서는 한국 재벌의 전근대성을 고스란히 보여줬다는 극단적 평가를 받는 재벌 총수이기도 했다.



◇ 삼성가 막내아들에서 후계자로







이건희 회장은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삼성그룹 창업주인 호암(湖巖) 이병철 회장과 박두을 여사의 3남 5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제일비료 회장을 지낸 맹희 씨와 고인이 된 창희 씨 등 두 명의 형이 있어 아들 중에서는 막내아들이었다.

여자 형제로는 인희(한솔그룹 고문), 숙희, 순희, 덕희 씨 등 네 명의 누나가 있으며 여동생으로 신세계그룹 회장인 명희 씨가 있다.

당시 부친인 이병철 회장은 대구 서문시장 근처에서 청과·건어물 무역회사인 삼성상회를 경영했다.







이건희 회장은 대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1947년 아버지의 사업 확장과 함께 서울로 상경한다.

이후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53년 선진국을 배우기 위해 일본 도쿄로 3년간 유학을 떠났다가 서울사대부속중학교에 편입했고 서울사대부속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일본 유학 시절에는 1천200편 이상의 영화를 본 것으로 알려지는 등 영화에 심취했으며, 고등학교 시절에는 레슬링부에 들어가 2학년 때 전국대회에서 입상했다.

당시 스포츠와 맺은 인연을 계기로 대한레슬링협회장을 지내는 등 아마스포츠 육성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1996년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 됐다.

서울사대부고를 나온 뒤에는 일본 와세다대학 상학부로 진학한 후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경영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애초 부친은 이건희 회장에게 중앙매스컴을 맡길 계획이었던 데 따라 대학원에서 부전공으로 매스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다.

이후 1966년 동양방송에 입사한 후 이듬해 홍진기 중앙일보·동양방송(TBC) 회장의 장녀인 홍라희 여사와 결혼했다.

결혼 후 삼성 비서실에서 2년간 근무하면서 삼성그룹의 큰 그림을 보게 된다.







막내아들인 이건희 회장이 삼성 경영권을 물려받기까지는 약 20년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1966년. 이 회장의 둘째 형인 창희 씨가 '한비 사건'(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구속되고, 맏형인 맹희 씨도 밀수에 관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삼성은 당시로선 거액인 2천400만원의 벌금을 냈고, 이병철 회장은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한비 지분 51%를 국가에 헌납한 후 경제계에서 은퇴했다.

창업주이자 오너가 물러나는 큰 사건이었다.

서른여섯이던 맹희 씨는 삼성의 총수 대행으로 10여 개 부사장 타이틀을 달고 활동했다.

당시만 해도 장자상속이 대원칙이던 시절이라 삼성의 경영권이 장남인 맹희 씨로 넘어갈 듯 보였지만, 한비 사건 이후 이어진 혼란과 청와대 투서 사건 등으로 해외를 떠돌게 된다.

이병철 회장은 훗날 자서전에서 "주위 권고와 본인 희망이 있어 맹희에게 그룹 일부의 경영을 맡겨봤는데 6개월도 채 못 돼 맡긴 기업은 물론 그룹 전체가 혼란에 빠져 본인이 자청해 물러났다"고 회고했다.

이후 이병철 회장은 1971년 막내아들 건희에게 삼성을 맡기기로 결단을 내린다.

1차 오일쇼크로 경제가 휘청이던 1974년에는 흑백TV가 주력제품이었던 삼성전자의 이병철 회장이 "반도체는 산업의 쌀"이라며 반도체사업 진출을 선언하는 데 큰 전기를 마련한다.

당시 반도체사업 진출을 머뭇거리던 이병철 회장을 설득한 것은 아들인 이건희 회장이었다.

동물적인 사업감각의 소유자였던 이병철 회장도 아들이 반도체 얘기를 꺼내면 "이놈아, 그 돈이면 TV를 몇백만 대나 더 만들 수 있는데 그 쪼그만 것 만드는 데 쓰겠다는 거냐"며 답답해했다고 한다.

'TV 하나도 제대로 못 만들면서, 최첨단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거나 '미국 일본보다 20~30년 뒤쳐졌는데, 따라가기나 하겠는가?'는 회의론도 나왔다.

지금이야 반도체 하면 '삼성'을 떠올리는 시대가 됐지만, 그 때만 해도 한국반도체 인수는 말도 안되는 공상과 같은 이야기였다.

일본의 한 기업 연구소는 '삼성이 반도체를 할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라는 보고서를 내놓으며 비판 하기도 했다.

이건희 회장은 그러나 "언제까지 그들의 기술 속국이어야 하는가"라며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에 삼성이 나거야 한다"며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 오늘의 삼성전자로 키웠다.

1970년대 미국 실리콘밸리를 누비면서 첨단 하이테크 산업만이 살길이라는 통찰을 얻은 결과였다.







삼성그룹 후계자로서의 본격적인 경영수업은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시작됐다.

이병철 창업주가 위암 판정을 받고 약 2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이듬해에는 삼성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해 삼성의 해외사업추진위원장을 맡았다.

이 회장은 후계자로서의 능력을 검증받기 위해 당시 국영기업으로 민영화를 추진하던 유공(대한석유공사)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멕시코로 날아가 대통령과 국영석유사 최고경영자(CEO)를 만나 원유도입선을 개척하려 했지만, 선경이 승리했다.

1982년에는 개인적으로 아찔한 순간이 닥친다.

그해 가을 어느 날 푸조를 몰고 양재대로를 달리다가 트럭과 충돌해 2주간 치료를 받는다.

mrle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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